파스칼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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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제160대 교황. 클뤼니 대수도원의 사제 출신이며, 당시 중세 시대의 교황 기준으로는 이례적으로 약 20년이라는 오랜 재위 기간을 보냈다.
2. 서임권 분쟁[편집]
2.1. 하인리히 4세와의 분쟁[편집]
파스칼 2세는 즉위한 후에는 곧바로 대립교황들을 차례대로 축출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교황권을 확립하기 위한 사실상 마지막 과제가 남았는데 그것은 바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의 서임권 분쟁이었다. 그래서 교황은 전임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정신을 계승한 정책들을 적극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에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서임권은 자신의 권리라고 강력히 피력하자, 교황은 1102년 교회 회의를 통해 황제의 서임권 행사 금지를 재차 확인한 후 하인리히 4세를 아예 파문했다.
아버지의 파문 소식을 들은 하인리히 5세는 하인리히 4세가 파문으로 영향력이 약해진 틈을 타 1105년 반란을 일으켰고, 반란 소식을 들은 파스칼 2세는 하인리히 5세를 지지했다. 이후 반란은 성공했고 하인리히 4세는 결국 폐위되었다.[1] 새로 즉위한 황제 하인리히 5세는 비록 교황과 함께 손을 잡아 자신의 아버지를 적대했지만, 서임권 문제에 관해서는 아버지보다 더욱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 1106년 1월, 하인리히 5세는 제국 의회를 통해 서임권 분쟁을 해결하고자 교황에게 초대장을 보냈으나, 교황은 이를 거부하고 1106년 10월 교회 회의를 소집해 황제를 포함한 모든 평신도에겐 서임권을 금지한다는 점을 다시 천명했다.
2.2. 하인리히 5세와의 분쟁[편집]
파스칼 2세는 1106년 하인리히 5세와의 서임권 분쟁 중에 프랑스 왕국의 국왕 필리프 1세에게 중재를 요청하고자 직접 프랑스를 방문했으나, 아무런 소득 없이 이듬해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그 와중에 하인리히 5세가 자신의 황제 대관식을 로마에서 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향하자, 위험을 느낀 파스칼 2세는 1111년 하인리히 5세에게 비밀리에 타협안을 제시하며 협정을 맺었다. 협정의 내용은 황제가 서임권을 포기한다면, 대신 독일에 있는 교회의 재산과 권리를 황제에게 넘기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에 대해 독일 교구를 담당하는 주교들과는 상의가 없었다. 이것이 나중에 엄청난 파급력을 일으켰는데, 같은 해 하인리히 5세의 즉위 대관식에서 협정 내용이 발표되었을 때 자신의 재산과 권리를 황제에게 반납해야 하는 독일 주교들과 영주들이 크게 반발했으며, 평소 하인리히 5세를 좋게 보지 않았던 로마 시민들은 그 틈을 타 봉기를 일으켰다. 혼란스러운 사태가 발생하자 하인리히 5세는 급히 대관식을 중단하고 교황과 일부 추기경들을 인질로 잡은 후 피신했다.
하인리히 5세에게 생포당한 파스칼 2세는 인질로서 약 두 달여간 감옥살이를 했으며, 카푸아 공작 로베르 1세가 이끄는 노르만 군대가 교황을 구출하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군을 공격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다. 혹독한 감옥 생활을 견디다 못한 교황은 결국 하인리히 5세에게 굴복하여 황제의 서임권을 인정했다. 그 후 하인리히 5세는 인질로 잡았던 교황과 추기경들을 풀어준 뒤, 1111년 4월 13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즉위 대관식을 다시 열어 그곳에서 과거의 일은 잊고 이후에는 어떠한 보복 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합의를 한 후, 로마를 떠났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이 불만을 가진 교회 개혁파는 1112년 3월에 개최된 시노드를 통해 황제의 서임권 인정은 폭력에 의해 강요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라고 선언했다. 결국 1112년 10월에 개최된 시노드에서 하인리히 5세를 파문하기로 결정했으며, 파스칼 2세는 이를 승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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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러나 하인리히 5세는 시간이 흘러 아버지와 화해하고자 교황을 찾아가 그의 사면을 요청하기도 했다.